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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and Only

유서작성 연습 '아들에게'

by 팬시남 2021. 1. 21.

 

무려 15년 전, 대학교 과제로 작성했던 아들에게 전하는 유서. 지금 읽어 봐도 그 때와 크게 달라진 생각이 없는 것 같다. 근데 '적지 않은 재산이라니... 저 자신감은 뭐지? ㅎㅎ' 


사진출처 unsplash @JohnnyCohen

아들에게

 

 세상에 태어난 지 80년 남짓, 까마득하게만 느껴졌던 순간이 서서히 눈앞으로 다가옴을 느낀다. 그간 내가 살아오면서 느꼈던 감상들과 소소한 삶의 기록들은 내가 보관하고 있는 5개의 상자 속 백 여권 남짓한 수첩들에 기록되어 있고, 그 내용들을 책 한권 분량으로 정리했으니 소량으로 출간하여 몇 권정도 보관해주었으면 좋겠다. 거기에는 학창시절의 일상부터 너를 기르는 동안의 소회, 직장 생활의 고충 등 내 인생의 모든 단편들이 들어있다. 거리낌 없이 쓴 것이긴 하지만 ‘훗날 누군가 읽어볼지도 모르는 글’이라고 의식하며 기록했기 때문에 가끔 들추어 보면 살아가는데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제 정말 하나 둘씩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정리해야 할 때가 온 것 같구나. 가장 가까운 곳부터 정리 해나가야겠다.

 먼저 내 육신(肉身). 너도 알다시피 나는 오래전에 장기기증 서약을 했다. 몇몇 부위를 제외하고는 비교적 건강하다고 생각하니 관계기관과 잘 협조하여 처리해주길 바란다.

 두 번째로 내가 가지고 있는 재산이다. 우리 집의 서재. 내가 그 공간과 그곳의 물건들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누구보다도 네가 잘 알 것이다. 중고등학교 때부터 사서 모은 책들을 버리지 못하는 성격 탓에 지금까지 가지고 있지만, 이제는 그것들을 정리해야할 때인 것 같다. 네가 잘해줄 것이라 믿는다. 오래된 책들은 모두 버리고, 상태가 좋은 책들은 근처 도서관에 기증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내 명의로 된 부동산과 동산. 이십대 후반부터 직장 생활을 하면서 많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적지도 않은 금전적인 재산을 축적했다. 종종 이야기한 것처럼 재산의 절반은 사회에 기증했으면 좋겠다. 어느 단체에 기증할 것인지는 네가 잘 선택하리라 믿는다. 나머지 재산은 너와 네 동생이 동등하게 나누었으면 좋겠다. 젊었을 때부터 나는 돈이 행복을 보장하지는 않지만, 돈이 없으면 불행해진다는 생각을 했다. 너도 알다시피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곳에는 과감히 지출했고, 그 외에는 철저하게 절약하며 살아왔다. 적절한 재테크로 재산을 불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하고 효과적인 방법은 쓰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상으로 내가 너에게 유형적으로 남길 것에 대한 이야기는 다한 것 같구나. 고리타분한 처세술쯤으로 여길 수 있겠지만 살아오면서 생각했던 몇 가지 것들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하련다. 아마 너에게 처음으로 하는 이야기는 없을 거다.

 젊은 시절 <인생의 대차대조표>라는 제목의 칼럼을 읽은 적이 있다. ‘어떤 인생이 성공적인 인생인가?’라는 인간의 영원한 화두에 명확한 답을 주는 글이었다. 죽음을 앞두니 그 내용이 더욱 가슴에 와 닿는다. 죽음을 앞두고 작성되는, 살아남은 자의 가슴속에서 완성되는 인생의 대차대조표에 권력이나 돈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이.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주변의 사람들이라는 사실이. 네가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끊임없이 베푸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두 번째로는 낙관주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 지금의 나는 누구나가 인정하는 낙관주의자이다. 하지만 나도 젊었을 때는 일어나지도 않을 일에 대해 미리 걱정부터하고 보는 회의주의자였다. 심지어 스트레스성 위염을 앓기도 하였다. 청춘의 패기와 도전은 나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 하지만 내 고통과 고민의 원인은 일어나지 않은 일을 걱정하는 것에서부터 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후부터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오늘은 오늘 일만 생각한다.’ 조금씩 내 삶은 개선되었고, 난 삶을 낙관할 수 있었다. 때때로 비관적인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낙관에 대한 강박 때문에 힘든 일을 겪기도 하였지만 그것이 내 삶의 방향을 바꿀 만큼 나쁜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마지막으로 기록하고 준비하는 자세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 내가 남긴 수첩과 노트들을 보면 알겠지만 나는 젊었을 때부터 기록하는 것을 좋아했다. 특히 러시아의 과학자 류비셰프에 관한 책을 읽고, 그와 같이 행동하기는 힘들더라도 그 흉내라도 내보려고 노력했다. 결과적으로는 실패했지만 나름대로 내 필요와 상황에 맞게 기록하고 행동하는 데는 성공했다. 아버지라는 이유로 이렇게 세세한 삶의 방식까지 너에게 강요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돌아보았을 때 내가 행한 방식이 살아가는데 큰 도움이 되었기에 마지막까지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제 내가 할 이야기는 거의 다한 것 같다.

 

 너를 처음 봤을 때가 떠오른다. 너도 자식을 낳아봐서 알겠지만 그 때 나는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세상에 또 다른 내가 살아 숨 쉬고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신기했는지. 어린 너와 가능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려고 노력했다. 나이 들어 행여나 너와 함께 보내는 시간들이 어색해질까봐서. 그러는 아버지의 청을 들어주고 함께 시간을 보내주는 네가 아주 고마웠다. 그리고 반듯이 성장해서 너 역시 한 집안의 가장이 된 지금도 네가 무척 자랑스럽고.

 이 말을 너에게 한지 무척이나 오래 된 것 같다.

사랑한다. 나중에, 수십 년 후에 우리가 다른 곳에서 만난다면 그 때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처럼 가까운 관계였으면 좋겠구나.

내 존재의 유무가 더 이상 너의 일상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안심하며 나는 이만 떠난다.

부디 행복하게 지내거라.

 

 

 

 

 

-2065년 어느 날

 너의 아버지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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