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을 말로 표현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사람들이 음악 파일이나 영화의 캡처 사진을 가사나 대사와 함께 블로그나 미니홈페이지에 옮겨 놓는 것도 그것이 감동을 공유하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를 본지 2개월 정도 됐나. ‘올해 본 영화 중 최고’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매우 인상적이었지만 가슴 속에 밀려오는 감동과 공감의 이유들을 잡아내어 글로 정리하기 힘들었다. 영화를 한 번 더 보고 났는데도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 보았을 때 놓친 대사들이 몇 개 들어오고 무심코 넘긴 몇몇 장면들이 눈에 들어올 뿐이다.
세 가지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이 영화는 처음 두 개의 에피소드가 마지막 에피소드로 수렴되는 구조이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의 미라와 무신의 어중간한 관계와 두 번째 에피소드의 선경과 경석의 어색한 남매관계는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정서적으로 유대 깊은 가족관계를 이룬다. 그리고 이 두 가족의 이야기는 채현과 경석을 통해 현재로 넘어온다. 무심한 듯 영화는 진행되지만 치밀하게 얽히고설켜있고, 지극히 현실적인 상황이 전개되지만 끝은 판타지로 종결된다. 이러한 판타지를 통해서 감독은 세상에 존재하기 어려운 헤픈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헤픈 게 나쁜 거야?” 라고 채현은 경석에게 묻는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그걸 말이라고 하니, 헤픈 건 나쁜 거야.’ 라고 마음속으로 대답했다. 내가 만일 경석의 입장이었더라도 그렇게 화를 내고 헤어짐까지 생각했을 것이다. 경석이 니가 옆에 있어도 외로워 죽을 것 같다고 했던가. 아. 그 말만큼 최근 영화를 보면서 공감했던 말이 있었나. 성격이 두드러지는 캐릭터는 아니었지만 채현의 상대역인 경석에게 감정이입이 가장 잘 되었다. 경석은 헤픈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살아왔고, 살아갈 것이다. 어머니, 누나(어느 새 어머니를 닮아있는), 채현, 그리고 미라와 무신(채현과의 관계가 지속된다는 가정 하에 따라). 영화를 보며 이렇게까지 헤퍼야하는 건가, 이렇게까지 헤플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물론 헤픈 것을 나쁘다고만 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이 베푸는 헤픔 때문에 나와 내 주변사람이 한 번 더 웃고 행복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없이 이기적이 될 수도 있는 그 물음에 대한 부정의 답을 내리기는 사실 매우 조심스럽다.
“너 나한테 왜 그래?” 어쩌면 이 영화는 이 대사에서 출발했는지도 모르겠다. 미라는 형철에게, 선경과 준호는 서로에게, 경석은 채현에게 이 말을 한다. 사랑받기 바라는 사람으로부터 실망하고, 그렇게 됨으로써 기대가 틀어질 때 그들이 상대에게 할 수 있는 가장 격한 원망의 말이다. 이 말을 “니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라는 말로 바꾸어 보면 어떨까? 못 견딜 것처럼 화내고 절망하며 묻지만, 그들의 마음 한편에는 너를 이해하고 보듬어 주어야 할 사람은 나 밖에 없는데 나한테 이러는 건 좀 심하지 않니? 하는 물음. 물론 그 의문 뒤에는 상대방을 인정하고 포용하려는 헤픔 또한 있을 것이다.
내가 중요시 여기는 가치 중 하나는 가족이다. 그것이 없으면 세상 모든 것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가족들에게 더 관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내가 생각하는 가족관계를 혈연의 문제를 떠나서 이야기 하고 있다. 굳이 한 집에 사는 혈연관계가 아니더라도 이해해 주고, 헤프게 받아주면 가족이 될 수 있는 것이라고. 나한테 왜 그러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도 사랑과 연민으로 보듬어 준다면 새로운 가족이 탄생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가족, 관계, 연애 등 상투적이기 짝이 없는 모티프들로 이런 이야기를 하는 작가와 감독에게 경이를 느낀다. 머리로 이해되는 영화보다 가슴으로 받아들여지는 영화를 원한다, 라고 김태용 감독은 어느 인터뷰에서 이야기했다. 내가 생각할 때 이번 영화는 그 목적을 달성한 듯하다. 삶과 사람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있는 감독의 다음 이야기가 기대된다.
- 2006 기록 -
'연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화감상문 <장미의 이름> 을 보고 (1) | 2021.01.27 |
---|---|
SF영화의 클래식 <블레이드 러너 > (1982년작) 감상문 (2) | 2021.01.26 |
경이로운 소문 여자 악귀 백향희역의 옥자연을 아시나요 (4) | 2021.01.10 |
넷플릭스 킹덤 시리즈 스핀오프, 킹덤 : 아신전 (전지현, 김시아) (6) | 2020.12.28 |
트로트퀸 송가인의 귀환, 2집 앨범 몽(夢)으로 컴백 (송가인 채널 쇼케이스) (0) | 2020.12.2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