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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

영화감상문 <장미의 이름> 을 보고

by 팬시남 2021. 1. 27.

영화 <장미의 이름> 포스터

 

웃지도 말고, 사랑하지도 말라

 

 

1.

 

 움베르토 에코의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장미의 이름>은 중세시대 이탈리아의 한 수도원을 배경으로 명석한 수도사 윌리엄이 연쇄 살인 사건을 파헤치는 내용이다. 7일 동안 수도원에서 있었던 일을 기록한 것이지만 원작 소설의 분량도 상당한 편이고,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세 유럽 역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기 때문에 원작자인 움베르토 에코는 장미의 이름, 창작노트라는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하지만 책보다는 훨씬 대중에 가까운 영화라는 장르는 책만큼의 노력을 쏟지 않고도, 그 내용과 말하고자 하는 바를 쉽게 알 수 있게 해준다.

<장미의 이름>은 윌리엄 수사가 중심이 되어 살인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단순한 탐정 추리물로 읽힐 수 있는 여지가 있지만, 그 이면에는 성서에 대한 엄숙주의가 어떻게 중세의 사람들을 억압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2.

 

 중세 이탈리아의 한 수도원. 그곳의 이단 혐의를 조사하기 위해 윌리엄 수도사와 그의 제자 아조가 찾아온다. 때마침 연쇄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악마의 소행으로 사람이 죽어 나간다고 믿는 기존의 수도원 사람들과는 달리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추론으로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음을 찾으려는 윌리엄 수도사. 결국 그는 죽음의 원인이 웃음에 관한 금서(禁書) 때문이었음을 밝혀내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론>이 그 책인데 사람들은 그것을 읽으려고 하다가 사서가 책장마다 발라놓은 독 때문에 죽게 된 것이다. 응당 가장 소중히 해야 할 사람의 생명에 앞서 사서가 지키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사람의 생명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론>이 사람들에게 읽혀지기를 두려워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중세 시대에는 순수하고, 기쁘고, 명랑한 웃음이 설 자리가 거의 없었다. 이는 그 당시 결정적인 권위를 가졌었던 성경에 고뇌가 없는 즉흥적인 웃음에 대하여 진술된 부분이 단 한 곳도 없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전혀 놀라운 사실이 아닐 것이다.

류종영
, 웃음의 미학, 서울; 유로서적, 2006, p93

 

 웃음은 인간의 고유한 몸짓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두려움을 없애준다. 두려움이 없으면 신에 대한 경건함도 사라지고, 신앙의 필요성도 희석되기 때문에 수도원 사람들에게 웃음은 금기 사항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웃는 동물이라 일컬으며 웃음을 인간 고유의 특징으로 보았다. 우리는 이러한 그의 생각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론>이 비록 실재하지는 않지만 어떠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을지 짐작해 볼 수 있다. 따라서 <희극론>이 담고 있는 웃음의 폐해를 알고 있었던 사서는 그 내용이 수도원사람들에게 읽혀지기를 두려워했던 것이다. ‘웃음이라는 가벼운 행위는 수도원의 질서 나아가 중세 사회의 존립 근거 자체를 뒤흔드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3.

 

 원작 소설을 읽어 보지 못한 내가 영화에서 본 또 다른 중심 이야기는 아소와 마을 처녀와의 사랑이야기였다. 중세시대 또한 지금과 마찬가지로 수도사는 육체적인 욕구를 절제해야 했다. 하지만 아소는 마을 처녀와 수도사의 정사를 목격하게 되고, 혼자 남겨진 마을 처녀와 어찌할 수 없는 강렬한 힘에 이끌려 사랑을 나누게 된다. 수도사라면 마땅히 억누르고 절제해야 하는 성적 욕망을 분출시킨 것이다. 사랑을 나눈 직후 아소는 자신이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다는 생각보다는 그 사랑의 황홀경에 도취되어 빠져 나올 줄 모른다.

아소와 마을처녀의 사랑이 의미하는 것은 신앙이라는 이름아래 억눌려 있지만 인간의 힘으로는 거부할 수 없는 육체의 힘이다. 어떠한 대화도 없이 그 둘은 처음 보는 순간 몇 번의 눈빛 교환만으로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추잡한 인간의 욕정으로 그려지지 않고 오히려 숭고하게 그려진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아소가 그녀와의 사랑을 평생을 잊지 못할 강렬한 추억으로 묘사함으로써 그들의 사랑은 당시의 금기와 통속함을 넘어 성스러움의 단계에까지 이른다.

그들의 비현실적인 사랑을 서양 과학사의 연금술적인 관점에 적용시켜 볼 수 있을 듯하다. 연금술적인 관점에서 남성과 여성의 결합은 감정적이며 신성한 단계로 표현된다. 이 관점에서의 육체는 생동하는 육체이고 여성의 생식능력은 신의 의지로 표현될 만큼 강력한 것이다. 따라서 아소와 마을 처녀와의 사랑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강렬한 사랑 그 자체로 이해될 수 있다. 이와 대비되는 기계론적 관점에서 볼 때 아소와 관계한 마을 처녀는 악마로 치부된다. 아소는 육체적인 욕구를 절제해야 하는 수도사인데 그가 관계를 가진 것은 처녀의 알 수 없는 마력 때문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 기계론적 관점에서는 기존 지배 체제의 입맛에 맞고, 신을 공고히 할 수 있는 악마라는 공공의 적이 필요한 것이다.

 

 

4.

 

 이렇게 볼 때 영화 <장미의 이름>이 단순한 추리물이 아닌 사실은 명확해 진다. 이 영화는 중세 사회의 질서 유지를 위해 억압 되었던 인간의 육체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웃음과 사랑 모두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성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둘 다 우리의 육체를 통해 직접적으로 표출할 수 있는 감정이다. 하지만 <장미의 이름>에 등장하는 수도원 사람들은 편협한 성서의 해석을 통해 웃음과 여성과의 사랑을 금기해야 할 것으로 여긴다. 성서에서 말하는 사랑이라는 기본 정신은 제쳐두고, 성서를 따른다는 미명하에 사람의 생명 따위는 하찮게 여기는 주객전도의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푸코는 억압이라는 권력의 행사방식은 권력이 가장 약할 때 쓰는 방식이다.”라고 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행사하기 위해 중세 교회는 인간들을 억압했다. 이러한 예는 우리나라의 현대 정치사에서도 발견된다. 과거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권은 민주주의라는 이념 하에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시켰는가. 자유라는 인간의 본성을 찾기 위한 노력을 정권의 우두머리들은 철저하게 억압했다. 정권 유지에 방해 된다고 여기면, 마치 중세의 마녀 사냥처럼 심문하고 고문하여 죄 없는 사람을 희생시킨 것이 그들이었다. 영화 <장미의 이름>이 성경이라는 당시 사회의 절대적인 권위(auctoritas)에 의해 억압되었던 인간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면 살아있는 우리 역사는 권력에 의해 억압되었던 국민들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담론이 현실을 강제할 때 억압이 된다고 했다. 웃음과 사랑 그리고 자유 등 그것이 어떤 것이든 인간의 자연스러운 권리는 억압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영화 <장미의 이름>은 어느 특정한 나라나 시대에만 한정 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현재의 이야기로 인간이 살았던 모든 시대와 사회에 적용되는 살아있는 이야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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