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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

SF영화의 클래식 <블레이드 러너 > (1982년작) 감상문

by 팬시남 2021. 1. 26.

 

"kill them in the name of man"

 

1. 

  영화 <블레이드 러너>는 인간과 똑같은 모습의 합성인간을 만들어낼 정도로 과학이 발달한 미래 사회를 그린 영화이다. 하지만 영화가 그리는 미래 사회는 암울하기만 하다. 시종일관 어두운 톤으로 그려지는 지구는 더 이상 살만한 행성이 되지 못함을 의미하고, 첨단 과학의 상징인 합성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생명에 대한 우리의 인식에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결국 <블레이드 러너>는 합성인간을처형하는 것이 아닌제거하는 임무를 맡은 데커드와 그에게 쫓기는 합성인간들 간의 갈등을 통해 인간이 타자의 삶과 죽음을 결정할 권리를 가질 수 있는가?’, ‘인간다움이란 어떤 것인가.’등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2.

  영화에서 리플리컨트로 불리는 합성인간의 대부분은 자신들이 합성인간인 것을 알고, 그들의 생명 또한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마지막까지 데커드와 싸우는 리플리컨트인 로이는 이야기한다. “공포 속에서 사는 기분이 어때? 그게 바로 노예의 기분이야.”라고. 자신이 원하지 않는 때에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은 때로 인간에게 해당되기도 하지만), 그리고 그들의 짧은 삶은 철저히 타인에 의해 지배된다는 사실을 그는노예에 비유한 것이다. 리플리컨트는 인간처럼 생각할 줄 알고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주체적인 존재지만, 인간이 시키는 것만을 해야 하는 수동적인 존재이다.

 

 인간의 명령 안에서 행동해야만 하는 상황, 여기서 그들의 불행은 시작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I think therefore I am) 라는 명제는 그들이 자신의 주체에 문제의식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는 과거 노예제 사회에서 평등 사회로 넘어 오는 단계의 시민의식 성장에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과거의 시민은 신의 창조물인 인간이고, 리플리컨트는 인간의 창조물인 합성인간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인간과 합성인간의 구분은 가능한가. 데커드와 로이의 대결에서 로이의 손은 유효기간이 있는 제품이 손상되듯, 점차 마비되고 로이는 자신의 손에 스스로 못을 박는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 로이는 데커드를 죽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살려준다. 로이가 스스로의 손에 못을 박는 것은 성경에서예수가 스스로 못박혔다.’는 이야기를 상기시키며, 로이가 데커드를 살려준 것은 기계에게 기대할 수 없는, 오직 인간에게 기대할 수 있는사랑을 의미한다. 그럼으로써 영화는 인간의 창조물인 리플리컨트가 신의 창조물인 인간보다 더 사랑이라는 신의 가르침을 잘 따르는, 인간다운 모습을 지녔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인간은 점점 더 비인간화되고, 리플리컨트는 점점 더 인간화 되는 역설적인 상황이 펼쳐지는 것이다.

 

 

3.

  데커드가 사랑하게 되는 리플리컨트 레이첼의 경우를 살펴보자. 리플리컨트를 제조하는 타이렐사()의 비서로 일하고 있는 그녀는 다른 리플리컨트들과는 달리 자신을 인간으로 알고 있다. 그녀는 자신이 경험을 가지고 있기에 인간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이식된 것일 뿐이다. 자신이 리플리컨트인줄 알고 난 후, 피아노를 치는 자신을 신기해하며칠 수 있는 걸 몰랐어요. 배운 적이 있는지 모르죠.”하는 이야기를 한다.

 

 데커드는 레이첼에게 연민을 느끼고, 레이첼의 도움으로 죽을 고비를 넘기자 자연스레 둘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서로의 눈을 맞추고, 키스를 할 때 인간과 리플리컨트의 경계는 무의미해진다. 사랑이라는 정신을 바탕으로 한 육체의 교감을 통해 레이첼은 리플리컨트가 아닌 인간이 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로이의 마지막 대사는 의미심장하다.

"나는 너희 인간들이 상상도 못할 광경들을 보았다. 오리온 셔틀의 불길 위로 공격해 들어가는 비행선들을 보았고, 타호이저 바다의 어두움을 밝힌 명멸하는 빛들도 보았다. 이제 그 모든 순간들이 사라지겠지. 빗속의 내 눈물처럼."

이는 로이가 인간들만큼이나 많은 경험을 했기 때문에 그 만큼 많은 생각들을 가지고 있고, 보고 느낀 것, 즉 자신의 육체로 직접 경험하고 느낀 것이 자신의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식된 경험이 아닌 내 육체가 경험한 것이 나를 인간답게 만들었다고 하는 로이는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육체의 교감을 통한 사물의 인식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리플리컨트인 자신의 존재도 유한하지만 인간 또한 유한하며, 리플리컨트라는 이유로 그들의 어떠한 경험과 생각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인간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4.

 

 리플리컨트를 제거하는 데커드는 인간을 대표하지만 영화에서 제시되는 장면은 그 또한 리플리컨트임을 암시하고 있다. 특히 데커드의 꿈에 등장하는 일각수가 데커드와 레이첼이 집을 나서는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고 데커드가 그것을 구겨버리는 장면은 그가 리플리컨트임을 말해주는 명확한 장면이다.(실제로 리들리 스콧 감독은 영화가 나온 지 20여 년이 지난 2000 7, 영국의 한 다큐멘타리 방송을 통해 데커드는 리플리컨트였다고 발표하였다.) - 홍성진의 영화해설, (네이버 영화 참조) - 

 

 꿈의 내용은 당사자만이 알 수 있는 사실인데, 또 다른 블레이드 러너인 가프가 그것의 내용을 알고 있다는 사실은 그 또한 기억이 이식된 리플리컨트임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데커드는 인간에 의한 또 다른 희생자가 된다. 인간을 위해 위험한 일을 대행하는 로이와 같은 존재인 것이다. 결국 자신도 리플리컨트임을 알게 된 그는 레이첼과 어디론가 떠난다. 그 동안 다른 리플리컨트를 제거하는 일을 맡았던 자신 또한 또다른 블레이드 러너에 의해 제거 될 수 있으므로. 그리고 지금 그의 옆에는 사랑하는 레이첼이 있으므로, 다른 이의 명령을 받지 않는 주체적인 삶이 가능한 장소를 향해 떠나는 것이다.

 

5.

  영화 <블레이드 러너>는 우리에게 언젠가 닥치게 될, 아니 이미 일어나고 있는 인간의 주체성과 생명에 대한 딜레마를 다루고 있다. 데커드의 경우처럼 생명체를 삶과 죽음을 선택할 수 없는 유통기한이 있는 제조품으로 다룰 때 누군가 우리 또한 같은 방식으로 인식할 수 있다는 섬뜩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결국 이 영화는 생명복제와 죄의식 없는 낙태로 대표되는생명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내가 존재하는 이유와 방식만큼 다른 이의 그것도 소중하다는타자성(他者性)의 인식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또한 갈수록 비인간화 되는 세상에서 결국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 힘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사랑이라는 것을 데커드와 레이첼을 통해서 넌지시 이야기하고 있다.

 

 공포 속에서 사는 기분이 어때? 그게 바로 노예의 기분이야.”라는 말은 영화를 보는 순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나에게 경각심을 준다. 언제나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두려워하며 최대한의 노력을 쏟아 붓지도 않는 나. 살면서도 살아가는 것이 아닌 살아지거나 살아내는 내 삶을 뒤돌아보게 만든다. 삶의 태도에 따라 나는 노예가 될 수도 있고 주인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너무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것 아닐까. 영화를 보는 내내 떠나지 않았던 생각이다.

 

-2008년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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