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느냐? 욕망하느냐?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낸 영화
영화 <올드보이>만큼 개봉 이후 많은 담론이 쏟아져 나왔던 영화도 드물 것이다. 영화평론가 황진미는 이 영화를 ‘파시즘에 관한 영화’라고 했고, 건축가 김진애는 영화 속의 펜트하우스와 8평짜리 감금방을 가리켜 ‘괴물공간’이라는 지옥에 비유했다. 여권운동가 변형석은 이 영화를 ‘이 시대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한 남성의 성적 판타지에 대한 고백’이라고 까지 일컬었다. 그들의 논리를 따라 글을 읽다보면 어느 것 하나 틀린 말이 없는 것 같다. 그 만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영화라고 할까. 실제로 영화에서 이렇다 할 주장은 찾기 힘들다. 다만 벌어진 사건들을 제시만 할 뿐이다.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는 피가 난무하여 끔찍하긴 하지만 ‘근친상간의 문제’를 다루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수업시간에 두 번째로 보았을 때는 수업 내용과 연관시켜 보려고 해서 그런지 전에 보지 못했던 내용과 화면들이 눈에 들어왔다. 영화를 보는 좋지 않은 습관이라 생각하긴 하지만 그 덕분에 나는 이 영화와 관련된 몇 가지 금기와 억압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말'이라는 표현 욕망의 억압
첫 번째는 ‘말’이라는 표현의 욕망에 대한 억압이다. 영화의 첫 부분에는 오대수가 술에 취해 경찰서에서 난동을 부리는 장면이 나온다.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그의 모습이 재미있기도 하지만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그 때문에 매우 불편하다. 경찰서에서 나와 친구가 오대수의 집에 전화를 하는 사이 그는 납치된다. 그 자신은 인식하지 못했지만 어쨌거나 말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었던 그는 그것에 대한 응분의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15년의 감금 생활 동안 그는 말을 할 수 없다. 아니, 말을 할 수는 있지만 들어주는 이가 없으므로 그의 말은 아무런 의미를 지닐 수 없다. 긴 시간 동안 오대수가 받은 고통은 감금이라는 장소적인 제약 외에도 다른 이에게 자신의 말을 전할 수 없는 고립감이다.
이우진은 말한다.
“당신 혀가 누나를 임신시켰다니까! 이우진의 XX가 아니라, 오대수의 혓바닥이!”
그는 누나의 죽음이 시작부터 비극을 낳는 금지된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온전히 오대수의 말이 원인이 된 것이라 생각한다.
마침내 오대수가 미도의 정체를 알았을 때 그는 그 사실이 절대 미도에게 알려지지 않기를 바라며 무엇이든 하겠다는 약속의 증표로, 이우진에 대한 복수는 뒷전으로 한 채 혀로 이우진의 구두를 핥는다. 혀는 우리의 신체 중 가장 깨끗하게 다루어야 하는 부분 중의 하나이다. 반대로 우리의 신체 중 가장 깨끗하지 못하다고 할 수 있는 부위는 발이다. 그 만큼 그는 그 비밀의 유지가 절실한 것이다. 급기야는 가위로 자신의 혀를 절단함으로써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동시에 비밀이 유지되기를 염원하는 극단적인 표현을 한다.
한 사람의 삶과 죽음, 행복과 불행이 다른 사람이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에 좌우 될 수 있다는 새롭지 않은 사실을 이 영화는 말하고 있다.
'근친상간'이라는 금기
<올드보이>는 ‘근친상간’이라는 금기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근친상간은 이른바 지구촌 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세계에서 절대 금기시하는, 동물과 인간의 경계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금기 중의 하나이다. 영화에서는 남매간의 관계, 부녀간의 관계가 등장하지만 그들에게는 어떠한 죄의식이 없다. 일말의 선입견이 배제된 채 그것이 좋고 나쁘다는 가치 판단 없이 근친상간의 장면이 펼쳐지는 것이다.
“우리는 알면서도 사랑했어. 너희도 그럴 수 있을까?”
이우진이 오대수에게 던지는 질문은 관객인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그럴 수 없다, 는 대답이 대부분일 뿐더러 이러한 물음 자체가 금기를 깨는 질문이라는 생각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생각일 것이다.
“모래알이든 바위덩어리든 물에 가라앉기는 마찬가지예요.”
몇 번씩이나 반복되는 이 대사는 결과야 어쨌든 오대수의 말 때문에 이우진의 누나가 죽었다는 이야기로 해석될 수 있지만 근친상간의 문제로 보면 다른 해석을 해볼 수 있다. 최면을 걸어놓긴 했지만 육체적으로 끌려서 오대수와 미도가 관계를 가진 것에 대해 이우진은 의미를 부여 하고 있다. 알면서 사랑하나 모르면서 사랑하나 다 마찬가지라는 주장을 반복적으로 함으로써 오대수의 죄의식을 가중시키는 것이다.
이우진은 죄의식과 금기가 없는 사람이다. 과거, 누나를 사랑했을 때는 사회적 금기에 대한 고뇌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어른이 된 그는 살인이나 상해에 있어서 어떠한 죄의식도 느끼지 못하는 듯하다. 하지만 그는 보통 사람에게 있어 가장 큰 괴로움으로 여겨질 금기를 알고 있다. 그것은 근친상간으로 오대수에게 그것은 15년이라는 감금 생활보다 더 큰 고통으로 다가온다.
'관음'이라는 금기에 대한 욕망
관음증에 대한 욕망 또한 <올드보이>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것이다. 사전적인 의미의 관음증은 ‘변태성욕’과 관련되어 금기시되고 억압되어야 할 비정상인 것으로 여겨지지만 요즘 에는 관음증이라는 말은 비정상적인 훔쳐보기뿐만이 아닌 ‘흘끔흘끔 몰래보는 것’처럼 남의 행동이나 생활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지켜보고자 하는 욕망쯤으로 해석해도 될 것 같다. 물론 그 이면에는 여전히 본래적 의미의 관음증이 지닌 성적인 의미도 함의하고 있다.
오대수는 학교에서 우진과 수아를 목격하고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궁금해 뒤따라가서 결국 그들이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오대수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 현장을 그냥 지나칠 수 있었을까.
또 하나의 인상적인 장면은 이우진의 누나인 이수아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고등학교 동창인 영자를 찾아갔을 때이다. 오대수가 질문을 하는 와중에 계속해서 영자의 다리가 클로즈업된다. 카메라의 시선은 곧 오대수의 시선이다. 오대수의 시선을 느낀 영자가 조금 불편한 기색을 띠는데도 오대수의 시선은 변함이 없다. 무언가 더 알아내기 위해 정신은 집중하고 있지만 시선은 욕망이 이끄는 곳으로 향해있다.
이 처럼 철저하게 관음의 욕망에 따라 행동하는 것, 그것에서 오대수의 불행이 시작되었는데, 과거에도 그리고 현재에도 그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사회적 금기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다룬 영화
<올브보이>의 이야기는 위의 세 가지 억압받는 욕망을 버무려 만든 인간의 욕망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 중에서 영화를 끌고 나가는 중심된 소재는 역시 금기된 근친상간에 대한 욕망이다.
말과 근친상간 그리고 관음증이라는 욕망이 교묘하게 얽혀있지만 근본적인 문제의 출발점은 동생과 누나가 사랑한다는 것이다. 오대수의 관음도, 오대수의 말도 그들의 사랑이 없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회적 금기는 우리의 상상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개인의 상상까지 사회가 통제할 수 없으므로 그것은 논외로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 언급하거나 실행하는 것은 철저히 사회에 의해 억압된다.
그렇다면 이우진의 복수는 오대수 개인에게만 한정된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우진은 영화에서 엄청난 부자로 그려지지만 그에게 돈이란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듯하다. 돈이면 무엇이든 해결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그에게 돈이 없었다면 오대수를 15년 동안이나 감금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가 하지 못할 것은 없어 보인다. 그런데 왜 그는 오대수에 대한 복수가 완료 되었다고 생각되는 시점에서 죽음을 택한 것일까. 복수라는 것은 그것을 행함으로써 상대방에 비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 혹은 물질적으로 우위를 점할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죽음은 이 모든 우위를 의미없게 만드는 것 아닌가.
이우진의 죽음은 자신들의 사랑을 억압할 수밖에 없었던 사회에 대한 원망과 분노 때문이 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우진의 오대수에 대한 복수는 개인적인 의미를 넘어서는 사회적 차원의 것이 된다. 결국 <올드보이>는 사회적 금기에 대한 개인의 욕망, 그리고 그것을 억압하는 사회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 것은 아닐까, 하고 조심스레 결론을 내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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