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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김동인의 ‘김연실전’을 읽고

by 팬시남 2022. 9. 11.

들어가며

김동인의 이 작품을 읽기 전에 정이현의 <이십세기 모단걸 – 신김연실전>을 먼저 읽었다. 기본 얼개는 비슷하지만 가장 큰 차이는 김연실을 바라보는 작가들의 시선 차이인 것 같다. 두 작품 모두 3인칭 시점이지만 정이현은 친(親)김연실의 입장에서, 김동인은 반(反)김연실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이끌어나간다.

김동인이 그린 김연실

자유연애를 꿈꾸고 조선의 선각자가 되고 싶어 하는 김연실은 김동인의 소설에서는 몰지각한 여성으로 그려진다. 하나를 가르쳐주면 열을 알고,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실행해 나가는 점은 뛰어나지만 결정적으로 선각자가 될 것이라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깊은 사고를 하지 못한다.

사고보다는 신념이 앞서 상식에서 벗어나는 사고와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진정한 선각자이고 지식인이 되려면 신념에 앞서 사상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하는데 막연히 그것에 대한 호감만을 가지고 자유연애와 자유결혼을 주장하니 그 행동은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이러한 김연실에게 낭만적인 사랑은 불가능하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성교장면을 목격한 후 성교를 그저 남녀 사이에 있는 물건쯤으로 치부하게 된 그녀는 연애라는 감정의 존재를 이해하고 나서도 ‘남녀간의 교섭은 연애요, 연애의 현실적 표현은 성교.’ 라고 생각할 따름이다.

그녀에게 연애는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 아닌 행동하는 것일 뿐이다. 남자를 만났을 때 마음으로 자신의 감정에 귀 기울이지 않고 머리를 써서 지금까지 읽은 소설을 적용하여(이러한 행동이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부정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김연실의 경우 마음이 동하기도 전에 이 상황을 소설에 적용하여 자신의 마음을 판단한 것에 문제가 있다.) 그 남자와 자신의 감정을 연애감정이라고 단정 짓는다.

현재의 시각으로는 너무나도 시대착오적이고, 폭력적인 작가의 시선

‘이창수와 몇 번 연애(?)를 하였다.’는 구절을 보아도 그가 연애를 성교와 동일시하고 있어서 연애의 실체에 대해서는 무지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결정적으로 ‘경이라는 것을 모르는 연실이는 놀랄 줄을 모른다. 감동이라는 것을 모르는 연실이는 감동할 줄도 모른다.’ 라는 구절을 보면 감정이 우선시 되어야 하는 연애에 대해 연실이 무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자명해진다. 느끼지 못하고 믿기만 하는 자. 그것이 자유연애를 꿈꾸는 연실의 한계이다.

감정의 상호작용에서 비롯되는 연애를 사랑받아 본 적도 없고 그렇기 때문에 사랑해 본 적도 없는 연실이 이해하기란 힘들어 보인다. 하지만 소설을 통해 간접 경험을 충분히 한 것처럼 보이는 연실에게 일말의 감정의 동요도 일지 않는다는 설정은 납득하기 힘들다.

나가며

작가는 김연실을 통해 문란한 여자 유학생의 생활과 미성숙한 근대 여성의 허위의식을 비판하려 했다. 비판 자체를 문제 삼을 수는 없지만 소설에 드러나는 작가의 여성을 바라보는 태도는 불편했다. 남녀 관계에 있어서 모든 과실이 여성에서 비롯된다는 인식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작가의 세계관이 공공연히 인정될 수 있었던 시기는 그 만큼 여성의 감정과 지위는 억눌려 있었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문학적 완성도에 있어서 이 소설이 어느 정도의 평가를 받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 작품이 지닌 폭력성 때문에라도 이 작품에 최악의 점수를 주고 싶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의 여성작가 정이현은 이 소설을 여성의 관점에서 다시 써보기로 한 것 같다. 나머지 이야기는 <이십세기 모단걸>의 감상문에서 하기로 한다.

 

2007년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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